수요에스라강단
“기독교에는 ‘보상의 원리’ 그리고
‘반대의 보상 원리’가 확실합니다.”
< 마 6:1-4 >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내가 이런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아합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경향은 사실 인간의 본능적인 경향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기독교인들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사안이 발생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누구든지 일에 있어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가게 됩니다. 기독교 신자답게 하나님을 의식하든지 아니면 말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하나님을 의식한 사 람인지, 사람을 의식한 사람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울은 아무것도 아닐 때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왕으로 선택받을 때 성경은 사울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다고 밝히십니다. 왕이 되어서도 왕노릇 제대로 하기 어렵자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왕노릇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런 사울이 왕이 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시작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 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사람의 눈만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은 이와 정반대였습 니다. 다윗은 왕 사울에게 쫓겨 다니 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깁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칼을 빼어 찌르기만 하 면 되었습니다. 방어하는 사람도 없고 경호원도 없었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다윗은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그 일을 내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기회가 다시 한 번 다윗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의 부하들이 그런 다윗인 줄 알고 다윗에게 말합니다, ‘대장님, 대장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하십시오. 이번 에는 우리가 처치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은 말합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삼상 26:9)
사울만 없으면 그 모든 고난이 다 끝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기도 안 찌르고 부하들이 찌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했 기 때문입니다. 사람 생각, 자기생각 하지않고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 결과 엄중한 경고가 떨어집니다. ‘절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재판정은 매우 무서웠습니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산헤드린 공회의 경고에 대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들이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떨어 질지 뻔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닥칠 그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지금 자기 앞에서 자기네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생각 하고 하나님을 의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도 안 보이고 내 눈에도 보 이지 않지만 그러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일을 시키신 것 때문, 즉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 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요 17:8) 라고 말씀하 십니다. 당신 자신도 얼마든지 당신의 말 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말씁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심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요 12:49-50)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도 그렇고 일하시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 뜻대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기독교 신자들은 얼마나 더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들을 보고 계십 니다. 시원찮은 신자들도, 괜찮다는 신자들도 다 보고 계십니다.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 보고 계십니다. 일거수일 투족 그리고 모든 생각을 보고 계십니다. 왜 보고 계실까요? 보응하시기 위해 서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말하는가? 어떤 모 습을 갖추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서 보응하시려고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느 자리를 얻었거나 무엇을 이루었다면, 귀한 무엇을 가졌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 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지금 자리보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도리어 더 주실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보상의 원리’ 그리고 ‘반대의 보상 원리’가 확실합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1-42)
제자의 길이 쉽지 않습니다. 험하기도 합니다. 고생도 있고 손해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제대로 볼 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지십시오.![]()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말과 행동, 마음까지 다 보고 계시며 반드시 갚아주시는 분 이라는 사실이 위로와 안심으로 다가오나요, 아니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나요?
2.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나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때, 내 마음 이나 삶(가정, 대인관계)에는 어떤 자유함과 유익이 생길까요?
3.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심을 믿기에, 이번 주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소신 있게 실천해 보고 싶은 신실한 행동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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