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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이사야 9:1-7)
    2025-11-28 09:17:47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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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십니다.’

    이사야 9:1~7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의 사람이었습니다. 700년 전 갈릴리 땅을 향하여 이사야가 말합니다. ‘이 땅에 큰 빛이 생겨날 것이고 평강의 왕이 임할 것이로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북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해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항상 약탈과 고통과 눈물과 가난이 끊이지 않던 땅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암울한 땅에, 어디를 봐도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그 가난한 땅에 이러한 놀라운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그 이유가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땅으로부터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 아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른 것의 왕이 아니라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재물의 왕, 성공의 왕, 풍요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4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요한복음 1427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주님은 평화, 평안, 평강과는 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문제가 해결 되어야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것도 아주 잠깐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근심, 걱정, 고민이 해결되면 잠시 평안이 오지만, 또 다시 다른 일로 두려움과 근심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것과 다릅니다. 환경에서 오는 평안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얻게 되는 평안입니다. 안정감이고 만족감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그 평안과 만족은 우리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 이사야 97절 하반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고 싶어 하시는지, 하나님은 열심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오신 바로 그 모습입니다.

    우리는 죄를 좋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늦기 전에 화해하고 싶으셨는데, 그 화해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의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적극적으로 화해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또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화평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성공과 복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살던 수많은 사람들은 눈앞에 메시아가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못하고 버려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께 받고 싶은 것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은 평안이고 평화입니다. 그 평화로부터 하나님은 일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그 평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시한 것으로 치부하며 무시합니다. 눈앞에 화해할 기회가 있음에도, 용서할 기회가 있음에도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선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로마 시대 기독교 부흥의 역사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 가지를 꿈꿨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돈이었고, 두 번째가 로마 시민권이었고, 세 번째가 안정된 삶이었습니다. 먼저 돈을 열심히 법니다. 열심히 모아서 어떻게든 로마 시민권을 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사면 그때부터는 삶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좇아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쾌락과 방탕이 만연하게 되었고,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니까 사회가 정지됩니다. 귀족들과 사회의 엘리트층은 전염병에 걸린 가족을 내다 버렸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가족을 내다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버림받았던 환자들을 바로 기독교인들이 돌보았습니다. 하루에 5천명씩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갔는데, 기독교인들은 그들 곁에서 그들을 도와주고 간호해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그렇게 무시당하던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무시하던 그 로마인들을 돌봤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3세기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자들이 병에 감염 되었어도 이웃들의 질병을 감싸 안았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돌보며 치료하다가 그들의 죽음을 떠안고 대신 죽었다. 로마 사회는 혼돈이 가득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넘쳐났다.” 후에 그 모습을 지켜 본 수많은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원한다면, 정말로 하나님이 내 삶에 역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이 성탄의 계절에 기다려야 될 주님은 바로 평강의 주님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내 삶에 모시는 일입니다. 내 자존심을 조금만 굽히면 이웃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내 고집을 조금만 꺾으면 가족간에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손을 먼저 내미는 것입니다.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먼저 양보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평화이기에 그 평화를 위하여 내가 먼저 몸을 낮추어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이 역사하시고 주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이러한 평화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부간에 다툼이 있었다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자식이 서운케해서 자식과 등을 돌렸다면 그 자식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먼저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연락을 하는 것입니다. 직장 동료와 다투고 싸웠다면 내가 먼저 가서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평화를 위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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